[News] 카라테 이것이 궁금하다(상편) (2020.03.16.)



보도자료
홈 > 연맹소식 > 보도자료
보도자료

[News] 카라테 이것이 궁금하다(상편)<위원석의 삼위일체> (2020.03.16.)

<2018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가라테 구미테 경기 장면. 사진=연합뉴스>

<원문링크 :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550&aid=0000000079>


"일선 도장 지도자들과 간담회를 해보면 아직도 가라테를 배우려는 아이들이 입문 과정에서 꺼려하는 분위기가 많다고 합니다. 지난 해 한일 양국간에 긴장 관계가 높아지면서 이런 현상이 더 심해졌습니다." (대한카라테연맹 전용태 사무처장)

"일본에 뿌리를 두고 있는 무도 스포츠를 하는 국내 선수들에게 유도나 검도에서는 없는 시선이 가라테에만 존재한다는 점이 안타깝다. 음악에도 다양한 장르가 있듯이 가라테도 수많은 콤뱃 스포츠(combat sports) 가운데 하나로 그냥 인정해줬으면 좋겠다."(가라테 국가대표 이지환)

가라테는 전세계에 존재하는 많은 격투기 가운데 하나다. 세계가라테연맹(WKF)에는 현재 191개국이 가입해 있고, 전세계 수련 인구는 약 1억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오랜 준비 과정을 거쳐 올해 도쿄 올림픽에서는 처음으로 정식 종목에 채택됐다. 굉장히 국제적인 무도 스포츠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라테를 한다는 것은 약간의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오랜 기간 국제 무대에서 라이벌 관계였던 우리의 '국기' 태권도의 존재때문이다. 가라테에 대한 국내 팬들의 오해도 적지 않다. '삼위일체'는 도쿄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처음 펼쳐지는 가라테에 대한 궁금증을 2회에 걸쳐서 풀어본다.

('가라테'라는 한글 표기가 맞지만 대한카라테연맹은 경기단체명이기에 그대로 쓴다. 앞으로 인용하는 책 내용의 표기는 '가라테'로 통일했다.)

◇가라테의 기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가라테를 일본의 고유 무술로 알고 있다. 국내 팬들이 가라테에 가지고 있는 편견 내지 선입관은,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국기' 태권도가 있는데 '왜 하필이면 일본 무술인 가라테를 해야하는가, 또는 즐겨야 하는가'라는 시선과 연결된다. 그런데 가라테가 일본의 무술인가에는 여러가지 의문점이 많다. 물론 지금은 가라테가 일본을 종주국으로 하는 무술(또는 무도 스포츠)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져있고, 2020 도쿄 올림픽에서도 개최국 일본의 노력으로 사상 처음으로 정식 종목에 채택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라테의 기원은 복잡하다. 적어도 '순수한' 일본 무술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다.

한국 가라테의 총본산인 대한카라테연맹은 가라테의 기원과 역사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고대 인도에서 발생해 중국에 파급, 당나라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삼국시대를 거쳐 '오키나와-테(手)'로서 일본 본토에 전파된 이후 세계 각국으로 파급됐다. 일본에서 체계화, 활성화된 가라테는 세계각국으로 전파돼 1970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승인종목으로 채택됐고 일본을 대표하는 타격계 격투술로서 2020 도쿄올림픽 정식종목이 됐다.'

이 운동이 당나라에서 우리나라를 거쳐서 오키나와로 건너갔는지에 대한 실증적 자료는 없다. 다만 해방 이후 태권도라는 운동이 국기로 정립되고 정착되는 과정에서 '가라테의 영향'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오히려 우리의 (고유)무술이 가라테에 영향을 줬다'고 주장할 필요가 생겼던 것같다. 그래서 대한태권도협회도 홈페이지에서 '당시 일본인에게 선진 문화권인 백제인들이 맨손 무예를 지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맨손 무예를 한자로 표시하자면 '공수(空手)' 즉 가라테가 된다. 가라테와 태권도를 둘러싼 이러한 논쟁은 잠시 뒤로 밀어두자.

가라테는 오키나와의 고유권법인 '티'(手, 일본어 발음으로는 '테'라고 읽는다)에 중국의 남권 무술이 가미돼 발전됐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키나와는 지금은 일본의 일개 현으로 되어있지만 예전에는 류큐(琉球)라는 이름의 독립된 왕국이었다. 1429년 통일 왕국을 이룬 이 나라는 1879년 일본 규슈 지역의 패자였던 시마즈(島津)씨에게 멸망당하기 전까지 450여년간 독립된 왕국을 이뤘다. 그래서 오키나와 사람들은 지금도 '일본인'이 아니라 '오키나와인'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마치 스코틀랜드인에게 '영국 사람'이라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것처럼 말이다.

류큐 왕국은 시마즈씨가 이끄는 사쓰마에 병합당하는 과정속에서 두차례나 '가타나가리(刀狩)'를 당하게 된다. 가타나가리는 농민에게 칼을 빼앗는 정책으로 전국시대 말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실시했던 일종의 '병농분리 정책'이었다. 이후에는 오직 사무라이만이 칼을 찰 수 있게 된다. 류큐왕국에 실시됐던 가타나가리는 새로운 지배자 시마즈씨가 이 땅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무기를 '거세'하는 과정속에서 이뤄졌다. 그러다보니 오키나와 사람들은 맨손으로 자기를 지키는 무술을 더욱 연마하게 되었고 이것이 '테(手)'로 발전하게 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오키나와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남쪽 지방의 무술 남권이 영향을 주면서 '테'는 '가라테(唐手)'로 나아가게 된다. 일본에서 '가라(唐)'는 당나라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중국에 관련된 총합적인 것을 표시하는 단어로 주로 쓰인다. 즉 류큐 왕국 고유의 테(手)에 중국적인 것(唐)이 합쳐진 것이 '가라테(당수)'로 발전한 것이다.

이후 '근대 가라테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키나와 출신의 후나코시 기친이 일본 본토로 넘어가 가라테를 본격적으로 소개한다. 후나코시는 1922년 일본 문부성 주최의 첫 체육 전람회에서 가라테에 대한 사진을 처음으로 전시했고, 이듬 해에는 일본 유도의 창시자로 불리는 가노 지고로의 초청을 받아서 유도 유단자들 앞에서 가라테 연무를 선보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당수'는 1933년 일본의 무술단체인 일본무덕회로부터 공식으로 일본 무도로 승인을 받게 됐다. 류큐왕국의 고유 무술에 중국 남권의 퓨전됐던 '무술'이 일본 무술로 공인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공인을 받은 이후 일본 본토내에서는 '당수(唐手)'라는 이름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게 된다.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의 절정기로 중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이라는 표기대신 '공(空)'이라는 단어를 빌려와 '가라(唐)테'는 '가라(空)테'가 된다. 당과 공의 일본식 발음이 똑같아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당수가 공수로 변모하게 된 이유는 어떤 철학적 이유라기 보다는 일본이 군국주의로 돌입하게 됨에 따라 일본 사상계가 군부로부터 압력을 받아 점점 우경화되었고 당수라는 적국의 오리진을 나타내는 명칭을 버려야된다는 국수주의적 공기가 짙어지면서, 일본 본토내에서 가라테를 하는 젊은이들이 공수를 선호하게 된데서 비롯한다. 그리고 이때의 '공(空)'이란 불교와 관련된 어떤 형이상학적인 의미라기 보다는 단순히 '무기를 들지 않은 빈손'의 기술이라는 의미며, 이 빈손의 의미는 가라테의 원래적 성격, 즉 오키나와의 역사와 풍토에 내재하는 토착적 특질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김용옥 저, '태권도 철학의 구성원리',p.80)

정리하면 류큐라는 독립된 왕국에 존재했던 무술(테)이 중국 남권의 특성과 만나면서 '가라테'로 진화했고, 메이지시대때 이 무술이 일본 본토로 전파되면서 일본의 무술이라는 정체성을 점점 더해지게 됐다는 것이 다. 그래서 김용욱은 가라테는 실제로는 일본 무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단언하건대, 가라테는 일본의 무술이 아니다. 만약 유도를 일본의 무술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나는 이훈을 달 의사가 없다. 유도는 이미 전국시대에 유파가 성립된 재래의 유술을 가노 지고로라는 탁월한 사상가, 무술가가 고토칸 유도를 확립하면서 시작된, 명백한 역사와 근대적 개조를 가진 일본의 국기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가라테는 일본의 무술이 아니다. 가라테는 일본의 역사와 전혀 무관한 무술이다. 가라테는 오키나와의 무술인 것이다. 오키나와는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류큐제도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 제도는 지도를 펴놓고 보면 우리가 지금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일본 영토라는 개념에서 벗어난 거의 복건성이나 대만과 비슷한 위도에 놓인 남방문화권의 특이한 독립문명이다.' (김용옥 앞의 책,p.101~102)

현재 정통 가라테는 일명 '4대 유파'를 가지고 있다. 먼저 앞서 말한 후나코시 기친이 창설한 '쇼토칸(松濤館)'이 있다. 유파 가운데 가장 수련 인구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고, 초기 태권도의 형성에 영향을 줬다. 이외에 접근전을 중시하는 '고주류(剛柔流)', 스포츠로서의 가라테를 추구한다는 '시토류(絲東流)', 간단하고 합리적인 동작을 중요시하는 '와도류(和道流)' 등이 4대 유파를 형성하고 있다.

◇가라테와 태권도는 어떻게 서로 영향을 줬는가.

한국 사람들이 가라테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은 우리의 국기인 태권도와 가라테가 일종의 경쟁 관계에 있는 이유도 큰 것같다. 또 가라테가 태권도의 형성에 영향을 줬다는 이른바 '가라테 유입설'이 한국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측면도 있다. 실제로 1960년대나 70년대 초중반만 해도 가라테는 서구 사회에서 동양무술의 대명사로 통했다. 그래서 태권도 사범들이 미국에 진출했을 초기에는 도장에 고객을 유치하고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도 '코리안 가라테'라는 간판을 내걸고 홍보를 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1980년대부터는 이런 사정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태권도가 오히려 가라테보다 '세계화'에서 앞서갔다.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도 태권도가 가라테보다 휠씬 빨랐다. 하지만 1945년 해방 직후 상황은 조금 다르다. 35년간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일본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것은 무도계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해방을 전후해 태권도 모체관이 태동했다. 모체관은 청도관, 무덕관, 조선연무관 권법부, 중앙기독교청년회 권법부, 송무관 등 5개소로 현대 태권도를 태동시킨 기간도장이라고도 한다. 청도관은 모체관 중 가장 먼저 개관했다. 이원국은 1944년 1월 일본에서 귀국해 서울 서대문구 옥천동에 있던 영신학교 강당을 빌려 '당수도 청도관'을 개관했다. 청도관의 '도'는 자신이 수련했던 일본 공수도 본관인 송도관(쇼토칸)의 '도(濤)'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태권도 모체관을 개관한 5명중 일본에서 공수도(가라테)를 배운 사람은 황기를 제외하고 4명이다. 이원국 노병직 전상섭 윤병인은 모두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서 가라테를 배웠다. 전통무예연구가 신성대는 "지금의 태권도는 원래 가라테, 즉 공수도로서 그 뿌리는 오키나와에서 온 호신용 권법이었다. 해방전후 일본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에 의해 우리나라 시중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해방후 태수도라는 이름을 거쳐 1965년 정식으로 태권도로 개명하여 한국 것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 서성원 저, '태권도뎐', p.10~22에서 발췌 인용)

'해방 이후 태권도와 관련된 최초의 서적은 1950년 무덕관 창설자 황기가 펴낸 <화수도 교본>이다. 화수도는 당수도와 더불어 태권도라는 명칭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전인 1950년대 통용되던 명칭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태권도 교본류의 책들이 출간됐다. 최홍희는 1965년 외국에서 영문판 태권도 책과 1966년 <태권도 지침>을 펴냈다. 최홍희는 회고록 <태권도와 나>에서 1965년 출간된 영문판 태권도 책에 대해 "이 책은 태권도와 가라테를 확연히 구분하는 분수령 역할을 하는 중요한 문헌이다. 이 책이 나옴으로써 태권도는 코리언의 것이고, 가라테는 일본의 것으로 점차 인식되기 시작했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서성원 저, '태권도 숲을 거닐다', p.204~205)

초창기 태권도란 이름의 무술이 가라테의 영향력에서 독립해 나가는 과정은 '삼위일체'의 '태권도는 어떻게 세계화가 되었나?(상편)에서 자세히 다뤘기에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겠다. (아래의 링크 참조)

[위원석의 삼위일체]태권도① 태권도는 어떻게 세계화가 되었나?(상편)

<지난 5월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경기 장면.사진=세계태권도연맹 제공>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스포츠 콘텐츠를 단 하나만 꼽으라면 방탄소년단(BTS)으로 대표되는 K-팝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지만 K-팝 이전에 한국을 전세계에 알린 독보적인 콘텐츠가 이미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국기...

서성원은 앞에 인용한 책 '태권도 숲을 거닐다'에서 이른바 태권도-가라테의 기원을 놓고 벌어진 가장 중요한 논쟁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1990년대 초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은 단연 김용옥이 저술한 <태권도 철학의 구성원리>였다. 저자는 이 책에서 "대한민국에는 태권도가 없다. 우리가 태권도라고 부르는 모든 무술의 조형은 완벽하게 메이드인 재팬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 추호의 거짓말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훗날 이창후는 <태권도현대사와 새로운 논쟁들>이라는 책에서 김용옥을 '가라테 유입론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하며 신랄하게 비판했다.'(앞의 책,p.206~207)

김용옥의 주장은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이었기에 사회적인 파장도 컸다. 이에 대한 여러가지 비판도 존재했다. 김용옥과 이창후의 주장을 중심으로 '가라테 유입설'의 논쟁을 먼저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김용옥은 가라테는 일본의 무술이 아니라 오키나와의 고유무술과 중국의 남권이 변증법적으로 통합된 무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원래부터 일본의 고유 무술이 아니었던)가라테가 해방이후 태권도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는 것이고, 태권도는 이후 가라테의 두 요소인 '가타(型, 태권도의 품새에 해당)'와 '구미테(組手, 태권도의 겨루기에 해당)' 가운데 후자를 더욱 발전시켜 '경기(競技) 태권'이라는 전혀 새로운 무도 스포츠로 성장하게 됐다는 주장이다.

'오키나와라는 태평양 한가운데의 문명속에 밀폐되어 있던 가라테라는 특이한 무술이 19020~30년대 일본문명에 소개된 것이나 , 1940년대 조선문명에 전파된 것이나, 1950~60년대 미국 문명에 상륙한 것은 모두가 보편적 현대문명사의 한 동시대적인 과정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며 거기에 어떤 편협한 국수주의적 분파의식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김용옥 앞의 책,p.103)

한마디로, 문명(문화)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오키나와를 기원으로 하는 가라테가 조선에 나중에 전파된 것에 대해서)우리가 콤플렉스를 가질 필요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경기 태권'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세계화에 성공한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는 주장인 셈이다. 김용옥이 주장하는 경기 태권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태권도가 당수도라는 일본 가라테의 구틀을 완전히 탈피하고 스포츠와 무술이 결합된 세계무술사의 대사건을 만들어냈다. 경기 태권은 일본 가라테가 가타(품새)를 주체로 삼고 구미테(겨루기)를 객체로 삼았던 철학을 완전히 전도시켰다. 태권의 존재 이유가 고정된 품새의 미학이 아니라 겨루기 현장의 승·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또 새로운 기술을 창조했다. 경기규칙은 손기술 중심에서 발기술 중심으로, 즉 차기기술 중심의 득점제로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차기기술의 놀라운 발전이 이루어졌다. '경기 태권'이 경기 중심으로 나갈 수 있었던 방법론적 혁신은 바로 일본 가라테계가 고집해온 슨도메(Non-Contact)를 지양하고 직격하는 풀 콘택트(Full Contact)로 바꾸었으며, 이에따라 방구를 채택한 것이다. 따라서 슨도메의 형식주의가 풀 콘택트의 상황주의·실제주의로 전환한 것이다.' (김용옥 책 121~125에서 발췌및 요약 인용)

여기에 등장하는 슨도메(寸止)는 직접 타격을 하지 않는다는 정통 가라테의 핵심 개념인데, 다음 하편에서 자세히 살펴볼 예정이다. 슨도메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것이 한국 출신 최영의가 창시한 극진 가라테(영어로는 풀 콘택트 가라테)이다. 현대 가라테는 크게 보면 슨도메를 추구하는 정통 가라테와 풀 콘택트의 극진 가라테로 나눌 수 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은 정통 가라테이다.

김용옥의 주장을 그의 표현으로 다시 정리한다면 '우리나라 근대 태권의 모체가 된 5관은 일본에서 가라테를 우발적으로 배운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우리)전통과의 연계는 전무하다. 해방후 우리나라 당수는 모두 일본 가라테의 완벽한 전이였다. 가타와 형의 동일성, 구미테와 대련의 동일성에서 이를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세계화, 경기화의 과정에서 경기태권이라는 미증유의 새무술을 탄생시킨다. 경기태권은 기존의 어떤 무술과도 단절된 세계무술사의 새 장르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경기태권은 가라테의 품새 철학을 완전히 깨뜨리고 연습과정이나 성취동기를 모두 겨루기 중심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해석하기에, 김용옥의 핵심 주장은 '태권도가 가라테에 영향을 받았다'에 있지않다. 오히려 '태권도는 가라테의 철학을 뒤집어, 완전히 새로운 무도 스포츠를 탄생시켰고 이를 통해서 세계화와 경기화를 먼저 이뤄낸 창의성을 발휘했다'에 방점이 찍혔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태권도가 가라테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은 태권도를 '국기'로 여기는 일반 팬들과 태권도계의 강한 심리적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태권도가 우리 고유 무술의 전통속에서 기원하고 발전했다는 이른바 '전통주의 사관'의 주장을 들어보자. 이창후의 책 '태권도 현대사와 새로운 논쟁'은 김용옥 등에 의해서 주장된 '가라테 유입론(이 말은 김용옥이 쓴 표현이 아니라, 그의 주장을 논박하려는 측에서 붙인 개념이다)'에 대한 반박을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 이창후의 주장을 정리해 본다면,

'첫째, 태권도는 태껸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발전한 한국의 전통 무술이다. 둘째, 태권도의 현대적 발전에 무술적인 측면에서 큰 영향을 주지 못한 가라테는 그 자체 탄생과 성립에서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한국의 무예전통에 의해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셋째, 태권도뿐만 아니라 합기도및 닌자의 기술들도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으로서, 특히 합기도는 다시 한국으로 온전히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이창후 저, '태권도 현대사와 새로운 논쟁들', p.14~15)

가라테는 태권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정도로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으며 오히려 가라테와 태권도의 발전은 동시대적으로 이뤄졌다고, 이창후는 주장한다.

'한국으로 가라테가 유입될 당시에 가라테는 이미 뿌리깊은 전통을 가진 일본의 고유무술로서 확립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일본 가라테의 시조로 추앙받는 후나고시는 1922년 문부성 주최의 제1회 체육전람회에서 처음으로 오키나와의 당수를 일본 본토에 소개하였다. 그러니까 청도관 초대 관장 이원국이 후나고시로부터 처음 가라테를 배우던 1926년부터 불과 4년 전이다. 해방 직후에 태권도가 "가라테의 유입에 의해서 생겨났다"라고 주장하고자 할 때 필요한 그 가라테 자체가 또렷하게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존재한 것이 있었다면 가라테의 원류가 된 오키나와의 무술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가라테 역시 해방 직후의 태권도와 거의 동시적으로 생겨나고 있었다. 단지 몇년 빨랐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일본의 무술사가들 대부분이 일본의 전통 무예속에 가라테를 포함시키지 않는다. 가라테의 원류가 된 오키나와 무술이 중국에서 유입된 무술로 추측된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된다. 여러가지 점에서 오키나와 무술은 중국의 남파 권법과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가라테 유입론자들도 이 점에 대해서는 크게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가라테 유입론자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이유로 인해서 이제 태권도는 원래 중국 남파 권법이 유입되어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가라테 유입론자들은 가라테까지만 추적하고 멈춘다. 즉 가라테 유입론자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만큼만 역사적 연원을 추적하고 거기에서 멈추며, 동시에 가라테가 해방후 태권도와 거의 동시대에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서 정립된 무술임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가라테 유입론에 혹해서 부화뇌동하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가 가라테는 마치 일본에서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무술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이창후 앞의 책, p.92~95에서 발췌 인용)
 


가라테라는 '이름과 형식'이 태권도라는 '이름과 형식'보다 선행한 것은 분명하다. 초창기 태권도의 모체관 사범들이 일제강점기때 가라테를 사사받은 것도 기록에 남아있다. 하지만 태권도가 가라테에 앞서서 '경기화'와 '세계화'에 성공한 것도 분명하다. 태권도는 발차기같은 기술에서도 가라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두 무도 스포츠는 한국과 일본의 숙명적인 관계만큼이나 얽키고 설켜 있어 보인다. 전용태 대한카라테연맹 사무처장은 '삼위일체'와 인터뷰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두 무도는 서로에게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사제공 위원석 칼럼
0 Comments


Category
방문통계
  • 현재 접속자 2 명
  • 오늘 방문자 39 명
  • 어제 방문자 63 명
  • 최대 방문자 79 명
  • 전체 방문자 3,187 명
  • 전체 게시물 143 개
  • 전체 댓글수 4 개
  • 전체 회원수 13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